영국 첼시 플라워쇼가 주목하고 있는 한국 디자이너 황지해의 정원 이야기.
무심하면서도 원시적인 한국 정원을 글로벌 무대에 소개하는 황지해 정원디자이너. 세계적인 정원 박람회 영국 첼시 플라워쇼에서 2011년 <해우소: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 2012년 <DMZ: 금지된 정원>에 이어 지난해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로 11년 만에 다시 한 번 금상을 받으며, 한국 최초의 ‘3골드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태초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의 회귀성을 존중하며,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삶에 대해 황지해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3 첼시 플라워쇼 이후에 어떻게 지냈나? 거의 2년간 하나의 전시를 위해 100m 달리기를 해온 것 같았다.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잠깐의 휴식 후에는 2025년 있을 폴 스미스 경과의 전시를 준비했다.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를 선보이게 된 시작이 궁금하다. 병원과 약국이 생겨나기 전, 우리는 산과 들의 약초를 통해 병을 치료하고 자연에 의지해 생존해왔다는 데에서 출발했다. 약초의 생장환경을 통해 식물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지리산을 주목한 이유는? 약용식물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1500여 종의 약초가 서식하는 지리산의 생태환경을 관찰했다. 지리산은 ‘한국의 어머니산’으로 불린다. 한국 최후의 원시림이며, 여전히 이름 없는 산봉우리와 계곡이 많다. 특히 지리산은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가 생성되기 전부터 존재해왔고, 20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바위가 품어온 사랑이 산야초를 길러낸다. 지리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미기후가 만든 약초의 생육 환경,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국에서 지리산의 생태환경을 재현하는 과정이 가장 고민이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식물과 돌 등을 대부분 영국에서 직접 공수한 과정이 궁금하다. 지난해 첼시 플라워쇼는 팬데믹 이후로, 이전보다 더욱 엄격한 규제가 있었다. 전시 후 이동 플랜이 심사 조건 중 하나였고, 정원을 만드는 과정 또한 꼼꼼히 살폈다. 탄소 중립이 실천될 것과 함께 바이러스 문제로 수입을 통제했다. 나무의 경우 보통 6개월 전에 수입해 영국 현지에서 약 3개월간 생육해야만 전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원에서 가장 큰 구조를 이룰 한국의 특산종과 희귀종, 멸종위기 식물을 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수소문 끝에 10년 전 DMZ 정원을 함께한, 영국 북쪽의 노스웨일즈에 거주하는 노부부에게 연락이 닿았다. 이들은 30여 년 전 한국의 지리산과 한라산, 울릉도 등지에서 씨앗을 가지고 와 노스웨일즈에서 키워냈다. 그들에게서 30년 된 지리산의 때죽나무와 함박꽃나무, 산초나무, 노각나무 등을 구해 정원을 준비했다.
지리산의 편마암은 어떻게 구현했나? 영국 전역을 오가며 돌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 중 거대하고 원시적인 지리산 바위의 형태와 질감이 가장 비슷한 스코틀랜드 북쪽 지역의 돌을 발견했다. 200여 톤의 돌과 바위를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온 것만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영국 국왕 찰스 3세와 정원 관람 후 포옹하는 모습이 큰 화제가 되었다. 찰스 국왕은 왕이기 이전에 정원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드너다. 기후 환경에 민감하며, 아시아 식물에도 관심이 많고, 무엇보다 우리 정원의 자연주의 식물에 관심을 보였다. 보통 쇼 가든 안쪽까지 직접 들여다보는 경우는 많이 없는데, 한국 정원의 면면을 깊숙이 살폈고, 약초건조장 안에서 짧게 대화하는 순간도 가졌다. ‘한국 정원을 영국에 가져와줘 감사하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전시 이후 정원 작품의 일부가 영국 왕실의 소유가 되었다는데. 첼시 플라워쇼에서 전시한 지리산 약초건조장이 ‘환경에 대한 희망의 상징’으로 영국 찰스 국왕의 별장인 샌드링엄 캐슬에 영구 보존되었다. 국왕이 사랑하는 캐슬 부지 안 노퍽 Norfolk 수목원에 세워졌고, 이를 위한 작업 진행을 도왔다. 또한 정원의 한국 식물은 암센터로 유명한 자선단체 매기 재단 Maggie’s Centre에 기부되어 암환자 약 3000명에게 보일 계획이다.
가장 한국적인 정원을 위해 중요시한 부분이 있다면? 원시성. 의도하지 않은 무심함. 한국은 본래 정원이 필요 없었다. 주변의 산천과 초목이 정원이니까. 하늘을 나는 크고 작은 새와 벌, 나비, 비와 바람이 정원디자이너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본래 있던 것을 되돌려줌으로써 원시로 돌아가고자 하는 식물의 관성을 존중해주는 것. 이것이 인간과 자연 간 공생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해외에서 직접 느끼는 한국 정원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다. 한국 식물의 차별화된 미학과 가치는 매우 잠재적이다. 특히 억겁의 시간 동안 지리산 편마암이 길러낸 산야초의 조형성과 생태 환경, 식물의 잠재력과 약학적 가치를 통해 우리에게 놓여 있는 기후 환경과 미래에 대한 생태관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원디자이너를 하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평면 작업에서 오는 재료의 한계와 가상 공간에서의 막연한 갈증을 느끼던 중 작업과 생존을 병행하기 위해 작은 골목의 벽화 일부터 조형물, 미술장식 등 현장 작업을 했다. 화판 너머에 살아 숨쉬는 작은 야생화와 풀 한 포기의 조형적인 질서, 변화, 자연의 창조 과정에서 내 존재와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식물이 스스로 드로잉해갈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사명감을 느낀다.
자연이 자생하며 뻗어가는 미래를 그릴 때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있다면? 생태적 양심, 미학적 양심.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나에게 정원 설계는 다음 세대를 위한 실질적 준비이자 행동이다. 자연이 하는 일에 동참하는 과정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식재 디자인에 대해 고민한다.
정원, 더 나아가 자연에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모호하고 불안한 나를 정돈시켜 주는 것. 나무가 움트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식물의 생태주기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영감을 준다.
올 한 해 행보가 궁금하다. 고양시 꽃박람회에서 <하늘 끝까지>, 전주정원박람회에서 <하고 싶은 말>을 선보일 계획이다. 또 서울 식물원 <움직이는 씨앗>을 재정비할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최초의 철학학교인 함평군 기본학교의 정원을 조성하고 있다. 세계 정원사에 우리 고유성과 가능성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정신적인 힘, 우리만의 고유 철학이 견고하게 뿌리내리기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해외 전시로는 2025 첼시 플라워쇼 준비 중인가?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 경과 함께한다. 그는 패션디자이너지만 모든 디자인 영감의 원천은 주로 정원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는 ‘멸종위기 식물 하나가 멸종위기 컬러를 만들어낸다’라는 메시지를 담으려 한다.